한국으로 귀국하는 날이다. 이를 위해 먼저 대만출국, 중국입국, 중국출국, 대한민국 입국의 번거로운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아무튼 발걸음 옮겨야겠지.


휴일 이른 아침, 창밖이 시끄러워 내려다보니 결혼식 행렬이 요란하게 지나간다. 아, 귀국을 미루고 싶다. 그러나, 

결국 배는 타야되고, 이 사진은 샤먼쪽 부두다. 사진 순서가 바꼈다. 

진먼다오에서 샤먼을 바라다보는 광경이다. 

이곳은 진먼다오를 떠나는 부두. 좀 허술해보이는데 아마 샤먼을 이웃동네 쯤으로 여기는 분위기라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 

양안민족은 본래 한가족이니 환영한다, 왕래가 잦으면 평화가 올것이다. 이런 뜻인가 보다. 남북한에게 필요한 말이다. 

떠나기 전에 진먼다오 지도를 한 번 더 본다. 

진먼다오 부두에 도착하여 출국수속을 받기전 부두의 모습.

해지람은 샤먼공항에서 웨이신에 돈이 남아 구입한 것이다. 진먼다오에서 구입한, 

진먼가오량지우..

마에스트로 우의 유명한 중국식도, 그리고 샤먼에서 구입한 납육(소금절임돼지). 다음엔 제대로 된 훠투이 구입예정..



여행정리

- 오랜만에 배낭이 아닌 여행을 하니 너무 편했다. 일단 중국어가 가능한 3분과 함께가니 뭐 필요한 것은 바로 해결이고, 차량이나 일정 등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 샤먼은 년중 봄이라는 자랑이 넘치지 않게 포근하고, 깨끗한 도시였다. 중국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중국여행을 꺼리시는 분이라면 중국이 얼마나 다양한 곳인지 알게될 것이다. .

- 샤먼-진먼 함께가는 여행을 추천한다. 그런 상품이 아마 없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배낭여행으로도 충분하다(진먼은 110볼트짜리 전원 준비 필요, 그리고 한국인들은 샤먼에서 일단 출국하는 것이니 여분의 비자가필요하다).

- 적대관계에서, 이웃으로, 그리고 경제적인 종속관계로 변하고 있는 샤먼-진먼 관계는 탐구되어야 할 주제다.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지, 변화된 남북관계에 답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내범위를 벗어난 문제군,,,

- 민난문화를 소개하는 박물관 등이 방문코스에서 빠져서 아쉽다. 일정상 어쩔 수 없었기에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사진을 올리려고 보니, 이날은 정말 여러곳을 돌아다녔다. 사진도 뒤죽박죽이고, 기억도 뒤죽박죽이니 이해바란다. 




검은 고양이가 누워있는 이곳은 본토와의 전쟁격전지중 한 곳이다. 바람이 몹시 불고, 이미 지친 오후라 설명을 듣는둥 마는둥,,, 열심히 설명하시는분은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 직전인 진먼다오주민이시다. 

이곳은 국립묘지. 중국문화에서 객사는 가장 끔찍한 죽음다. 뼈라도, 영혼이라도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 천년유혼에서 유골을 고향으로 옮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이런 문화적 배경 때문이다. 아무튼 이곳에 계신분들은 장개석-국민당에게 거의 강제로 끌려온 본토출신들로 돌아갈 방법 없는 병사들만 묻혀있다. 


823전사관앞에서 단체사진... 8월 23일은 진먼다오에 중국인민군이 전격상륙하여 벌어진 전투일이다. 이 준비없는 무식한 상륙작전으로 중국인민군은 박살이 났고, 이후 여러가지 정치적 상황으로 인민군은 다시 진먼다오를 공략하지 못하고 대만령으로 남게된다.  


어떤 장군의 사당인데, 이 기념물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중국전통 신수(도철?)로 진먼다오의 역사를 은유하고 있다. 

2차세계대전 말기에 진먼다오는 일본군에게 점령당하는데, 그 시절의 일본억압을 상징하는 기념비이다. 일본군에 끌려 동남아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기에 진먼다오 젊은이들은 차라리 고향을 떠나 화교가 되는 것을 선택한다. 이후 성공한 화교들의 고향에 보내는 돈은 진먼다오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진먼다오와 그 옆섬을 이어지는 다리공사. 이 다리는 관광업에 대한 필요에 의해 추진된 듯한데, 본토와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대만정부의 관심이 멀어지자 공사가 지지부지중이다. 준공날짜를 알수 없다고...

1970년대말에 대만과 본토의 대화이후 80년대초 대만본섬은 계엄령을 철회하는 등 민주화조치가 단행된다. 그러나 진먼다오는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계엄령하에 있게되었고 이에 진먼다오주민들의 계엄철폐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진먼다오에 계엄령이 절폐되는 것은 1980년대 말이다. 민주화운동당시의 사진(전시중이걸 찍음).

샤먼을 향해있는 해변에는 이런 장애물외에도 많은 지뢰 등이 묻혀있었다한다. 

샤먼을 향하고 있는 대만진영 탱크.

8월 23일 전쟁당시 중국인민군이 일시점령하여 작전본부로 사용했다는 건물. 이 건물에서 지휘부는 몰살 당했다고... 이건물을 70년가까이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진먼다오도 놀랍다. 

검은고양이가 지키고 있는 전쟁기념물. 왠지 분위기가,,,

과거에 모든 진먼다오 젊은이들은 대학을 위해 본섬으로 갔다고 한다. 최근 국립진먼대학이 세워졌다. 참고로 가이드의 오빠부부가 이곳 교수. 그리고 대학에 근무하신-부총장님이 교정을 보고싶어하여서 드라이브함.

진먼가오량 제2공장. 

만세만세만만세....

쇼핑을 마치고 단체사진..

차타고 떠나면서 아쉬워서 한 장 더 찍어본다. 

보통 다원이라고 불리우는 공창. 대만영화 '공중낙원'의 배경이된다. 

금문다원. 공창.

샤먼을 향해 선전전을 벌였던 지하기지.

이런 통로들이 기지 뿐 아니라 일반 주택가에도 존재한다. 본토의 폭격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방문한 마산마을의 회관지하에서 시작하는 지하통로를 빠져나오면 만나게 되는 중국바닷가의 흔한 신, '풍사'라한다. 

이런 출입구로 나온다. 모든 통로는 주민들이 직접 작업했다. 무보수로...

지하기지 통로로 가는 중, 이곳에서 우리는 익숙한 가수를 만나게 된다. 





중국인문군을 몹시 괴롭게했다는 대만가수 등려군이다. 대만정부의 비인간적인 대우에 자살한다(그녀의 사망원인은 정확하지 않다, 자살설은 그녀에게 가해지는 대ㅏㄴ정부의 비인간적인 대우 때문이라고 부총장님은 주장하신다). 그녀도 이곳을 방문해 본토를 향한 프로파간다에 이용된 듯...

이 선전기지의 이런 통로를 따라가면, 

해안을 볼 수 있는 '총안'이 나온다. 

샤먼과 가장 가까워 본토로 포를 발사할 수 있다는 기지. 지금은 진먼다오주민(여성까지 섞여서)이 관광상품으로 시연하는 중이다. 

시연 후 자유롭게 사진촬영.

이 대포기지 앞의 해변에 어떤 화교가 마련한 마을, 자기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마을을 조성했다고한다. 지금은 살아있는 '민'문화 민속촌으로 활용.

영화 공중낙원의 촬영지. 한국처럼 군바리 문화가 너무나 익숙한 나라라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는지, 공중낙원은 관객을 불러모았고, 영화촬영지는 관광지가 되었다. 

이곳을 관광지겸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기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영화의 장면.

그리고 마에스트로 우가 운영하는 그 유명한 포탄으로 만든 칼 공방. 재료로 쓰이는 포탄을 활용한 작품. 사실 본토에서 쏜 대부분의 포탄은 선전물을 뿌리기 위한 용도였다. 때문에 탄피가 파괴되지 않고 마에스트로 우에게 갈 수 있는 것이다. 70년대가 디면 포탄발사는 그저 의례가 된다. 하루는 샤면에서, 내일은 진먼에서, 모레는 샤먼에서, 빈포탄을 그저,,,

나는 이곳에서 두자루의 칼과 작은 손칼을 얻었다. 

공동묘지 입구.

돌아갈 고향을 잃은 병사들의 공동묘지.

공창, 초대소. 이 멋진 화교의 집을 일본인들이 빼앗아 사령부로 사용하다 국민군이 인수받는다. 이후 오랫동안 군간부들을 위한 휴게소, 공창으로 사용됐다. 이제는 관광지.

진먼다오 중심가에도 공창이 있었다한다. 그곳을 찾아보려다 발견한 주희(주자)사당.



진먼다오 출신들중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의 명패다. 우리를 안내했던 분의 오라버니 명패. 이런문화는 당나라시절 과거합격자들이 장안의 대안탑 낙서에서 비롯된 오랜된 문화다. 비석에 새긴다던지, 지역 사당에 명패로 만들어 걸어둔다든지, 이것들은 지역과 함께 영원히 보존될 것이기에 명앙있는 집안에서는 자식들 교육에 열심일 수 밖에.


다음날, 20여분 배로 바다를 건너 우리는 대만령 진먼다오에 도착했다. 샤먼에서 진먼다오로 가기위해서는 우리는 출국, 입국절차를 밟아야 한다. 놀랍게도 과거 적대관계에 있던 중국인들은 그냥 마실가듯이 진먼다오를 간다. 옛날에는 진먼다오에서 샤먼은 장보러 다니던 곳이었고, 이런 관계 때문에 뜻하지 않는 이산가족이 발생하기도 했다한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너무나 익숙하고 이해가되는 분단국가의 국민인 나,,,


간단한 입국절차를 거쳐 처음 마주한 진먼다오의 출입국관리소가 있는 건물.

먼저 진먼다오 주민들의 생활을 둘러보기로 한다. 특히 '민가'풍의 건물들과 화교자본으로 세워진 민+서양식 건물들을 눈여겨 봐야한다. 


이런 화교자본으로 세워진 초등학교 건물이 바로 민+서양식 건물이라 하 수 있다. 그러나 이 서양식이라는 것이 보통 식민지 동남아의 것들을 모델로 했기 때문에 이 조합을 민+서양+동남아 스타일이라고 불러야하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보는 중이다. 

이제는 박물관인 초등학교 교실에서 단체사진 한 번 찍고 가자. 

순수한 '민가'풍 집이랄까,,

크게 성공한 화교출신들은 고향에 이런 집들을 짓는다. 본체건물옆의 길쭉한 탑같은 창고는 도적에 대비한 피난처로 이곳에 귀중품과 사람이 피신한다. 본체와 이곳은 비밀루트로 연결되어 있으며 본체에는 이미테이션들로 꾸민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잠시 이집의 주인이 되어 아래것들을 훈육하고 있다. 


이런 천사의 문양에서 서양풍을 뚜렷이 느낄 수 있다. 

드디어 진먼가오량을 생산하는 진먼주조창1공장에 도착했다. 나에게는 평생의 숙제같은 방문이다. 

지금은 수원이 말라 제2공장에서 주로 제조하지만(그물은 중국 본토로부터 온다), 아직 1공장에는 발효창고들이 있어 술공장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술담그는데 사용된 옛 우물터.

그리고 진먼가오량지우의 모든 상품이 진열되어 있는 이곳에서는,

시음이 가능하다. 나는 이곳에서 4잔을 마시고, 바이지우술잔을 2박스(12개)샀다. 그리고 기념품으로 술잔 2개를 더 챙겼다(주머니에). 

중국에서 술을 사올 때 나는 가능하면  대용량의 병을 구입한다. 외국술 반입 기준이 1병으로 되어있다(물론 양은 1리터로 제한되어있다). 때문에 가능한한 큰 용량을 구입한다. 걸리면(그런적은 없었지만) 1병이라고 해서 1병만 산거라고 우기려고 한다. 용량은 몰랐다고 하면서,,, 이런 수법이 통할까,, 다음날 나는 이 술을 사게되고 무사히 귀국했다.  

이분이 바로 금문가오량지우를 만드신 분,, 그러나 곧 군발이들에게 공장을 빼앗기게 된다(금문고량주가 58도인 이유는 순전히 군바리들 때문이다, 어디에서나 군바리들은 독주를 즐길 수 밖에...,), 그러나 그것은 전화위복이되어 대만술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었고, 그 수익의 일부는 진먼다오주민들에게 돌아간다. 

때문에 그분의 이런 기념관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분과 나.

이제부턴 본토와의 전쟁을 대비한 군사시설들을 둘러 볼 예정이다. 

대만 본토에서 보급선, 등등이 본토의 대포를 피할 수 있도록 바다와 연결된 바위굴, 대단하다 군발이 정신, 그러나 굴을 파는데는 진먼다오주민들이 강제동원됐음은 당연한 사실,,,

아무튼 샤먼에서의 폭격을 피해 이곳까지 배가 들어왔단다. 

그리고 파인애플 챠오판(볶음밥)등 과일베이스의 자연식을 먹었던 식당.. 

오늘은 취안저우로 가 본다. 취안저우는 일찍이(송이전부터) 중국의 해상무역의 관문이었고, 때문에 푸젠성의 개방적인 문화를 상징하는 도시이다. 샤먼과 진먼다오, 멀리는 대만본섬까지 푸젠('민'이라고 하던가?) 문화이기에 취안저우를 건너 뛸 순 없었다. 

개원사를 찾아가는 골목. 

개원사는 원나라 시기(그러나 송때 시작)의 취안저우의 대표적인 불교유적이다. 

절에는 도시의 상징처럼, 두개의 탑이 우뚝 솟아있는데, 이름은 ,,,

이탑이 서탑으로 기억한다. 우리가  서탑을 가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동쪽탑인가.

개원사에서 20여분 차로 이동하여 해상무역박물관으로 갔다. 이곳은 옛날해상실크로드 등에 대한 전시와 당시의 화물선 구조, 이슬람과의 교류 등등에 대한 전시가 중심이다. 나는 북방실크로드 애호가라 조금은 건성으로 관람하고 이 사진만 한장 남았다. 모대학 부총장님...

취안저우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이슬람 상인의 동상(이맘,, 뭐라는 분인데 그 분의 책을 아직 읽어보진 못했다. 곧 읽을 것이다). 

이슬람 무덤의 흔적들..

무덤들..

그리고 다시 20여분을 차로 이동하여 이슬람사원인 청정사 근처에 오니 이슬람 스타일의 건물이 눈에 띈다. 

청정사 입구에서 단체사진.

중국 이슬람 사원중, 한족과 어울려 사는 지역의 사원들, 그리고 오랜 세월을 겪은 청정사들은 본건물을 제외하고 한족문화와 결합되어있다. 이곳 청정사(사진은 생략)의 일상생활 건물에서 그것을 뚜렷이 볼 수 있다. 

이곳은 진먼다오(대만령)와 포격전을 벌였던 샤먼의 최전방 해안기지다. 전쟁이 사라진 중국과 대만은 이제 옛 전쟁기지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마치 '전쟁놀이장'같다. 아니 실제 이 관광단지(?)안에는 서바이벌놀이장도 운영중이었다. 

통일에 대한 이런 정치구호도 분위기를 살려주고,,,

쓸모가 없어진 녹슨 무기들이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나팔형스피커.

스피커의 크기를 몸으로 보여주시는 부총장님,,,

이 두분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한분은 이곳에서 한분은 진먼다오에서 서로에게 증오의 말들을 날리셨는데, 양안의 평화와 함께 (그리고 한 분이 진먼다오에서 샤먼대학으로 유학을 온 후) 친구가 되었다. 분단국가 국민으로서 부럽다. 


그리고 첫날 입장하지 못한 샤먼대학. 샤먼대학은 그 빼어난 아름다움 때문에 관광객들의 필수코스가 되었다. 때문에 입장객을 통제하고 있으며, 늦은 시간이나, 주말이거나, 대학사정으로 입장을 못할 때가 있다. 우리의 첫날처럼..

우리가 샤먼대학을 다시 찾은 이유. 부총장님의 전공은 '뤼쉰'이다. 감히 감격하여 부끄러워 하신다. 1930년대초 곤궁한 처지의 뤼신은 샤먼대학으로 초청받는다. 약 6개월정도 샤먼대학에 머누르는데, 예술지상주의 문학가들로부터의 온갖 모욕을 당한 후 상하이로 가게된다. 이제 샤먼대학은 그의 동상까지 세워서 대학의 자랑스런 역사의 일부로 기억하고자 한다. 애잔하다.

그럼에도 뤼신과 단체사진.

교정의 아름다움을 웅변하는 매직아워의 샤먼대학, 저 너머로 바다가 있다. 

샤먼대학가에서 조선족 식당을 찾았다. 동북삼성을 대표하는 바이지우인 베이다이창. 황무지를 곡식창고로 바꾼 일등공신 조선이민자를 생각하며, 한잔 한잔 또 한잔... 오늘 많은 곳을 다녔네..


출발하기위해 버스로 가던 중 숙소옆에서 발견한 중국차에 대한 애호를 형상화한 조각물이다. 이 때는 몰랐다. 푸젠성이 차로 유명하다는 걸, 우이산의 대홍포를 비롯하여,,, 6시간 후에 우리는 질리도록 '차'를 마시게 된다. 


푸젠성에 왔으니, 당연히 토루를 안가볼 수 없다. 나는 중국민가에 대해 관심이 많아 여행스케줄을 정할 때 토루를 필수로 선택했다(그러나 나중에 알아보니 모두들 토루를 선택했다고,,,).  샤먼에서 토루까진 3시간 이상 버스를 타야한다. 먼저 푸젠 토루보우관(박물관) 앞에서 기념촬영.



보우관 로비의 장식한 '차'로 쌓은 탑

이런 엉터리 번역을 발견하면 가슴이 아프다. 샤먼대학에도 한국인 유학생이 꽤 된다던데,,,


아무튼 보우관에서 가이드를 만나(가이드 없인 입장이 불가한 듯, 가이드들은 모두 토루 주민들인데, 이런 시스템은 맘에 든다, 가이드 비용 100위안(18,000원).

위 사진처럼 마을 입구까지 내내 '객가인'들 중에 유명한 분들의 이름이(역사적인물에서부터 최근 스포츠스타까지) 별에 새겨져있다. 궈뭐루, 주희 등등. 나에게 중국문화의 어려움을 알게해 준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 그는 번번히 과거에 실패한 후 농민, 종교혁명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가 된다.  


마을 초입의 허물어지는 토루.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돌보는 이 없어 허물어간다고 하는데, 관광지로 개발된 이제는 누군가 수리하겠지, 기대해본다. 

원형 토루만 있지 않다고 몸으로 보여주는 방형토루. 토루 역사에선 초기스타일이다. 

그리고 관광객 필수코스인 원형토루.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토루앞 나무밑에서 망중한이신 할머니. 부러웠다. 

토루의 내부 한컷. 나머지는 패스다. 인터넷에 널려있다. 


나를 슬프게하는 것들...

가이드님의 토루 뒷편. 아름다웠다. 

가이드의 집에 초대되어 질리게 마시고 있는 우롱차. 잠시 후 누군가가 1kg을 사게된다. 나는 이즈음 보이차에 마음이 빼앗겨서 우롱차는 사진 않는 걸로...

다시 샤먼으로 돌아와 저녁 필수품인 바이지우를 구입. 샤먼특산인데 은단풍과 금단풍중 금단풍 선택. 그러나 푸젠성은 17대 명주를 배출하지 못한  곳. 보라, 도수도 40도가 안된다. 몇일 후 우리는 58도의 진먼가오량주를 만나게 된다. 

이곳 식당은 다음날 손님으로 오게된다. 

보너스 사진. 

토루마을에서 만나게되는 12지신. 각자 자신의 태어난 해에 맞는 지신을 찾아갔다. 나는 말이다. 마누라님은 개.

블러그를 만들 때 이 여행카테고리에 대한 의지가 불타올랐는데, 글을 올리시는 분들은 실감하겠지만, 쉽지 않다. 게으른 나에게는 더더욱..

그래도, 잊지않기위하여, 게으른글쓰기 사진위주로 올려본다. 



이번 여행은 경계(특히 적대관계로 국경이 맞닿아있는 지역)에 관심이 많은 선배의 제안으로 가게되었다. 물론 나로서는 이런 여행주제말고도 중국이라면, 당연히 따라갈 수 밖에,,, 

여행은 장소가 아닌 사람이닌까...


아무튼 대만인 진먼다오(금문도)와 3km남짓인 푸젠성 샤먼(복건성 하문)으로 날아갔다. 

샤먼공항은 아담하고, 그래서 편안하다(그러나 여기는 인천공항이군). 

샤먼공항에 내리자 우리와 동일한 주제로 여행을 온 한국분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모자와 안경을 착용하신분이 그 유명한 서승선생님이시다. 나는 대학때 그분이 주인공인 재일교포작가(이름은,,,?)의 책을 읽은적이 있는데, 너무 영광스러웠지만 말한마디 붙여보지 못하고 사진만 찍었다(이 분을 간첩으로 몰아 고문에 못견뎌 스스로를  화상 입힌 이 사건에 김기춘이 개입되어있다) 아무튼 이분들은 바로 진먼다오로 우리는 샤먼 시내로....

이 절은 남보타사다. 또 하나의 보타사는 저장성에 있는데 이곳은 남쪽이니 이런 이름이 붙였겠지,,,

이 절의 바로 앞이 샤먼대학인데 입장할 수 없어 대신 들린 곳이다. 

중국인민모자 스타일로 커스튬한 필자(몇개월 후 모자는 버스에 놓고 내리게 된다). 

도대체 이런 사진을 누가 찍었는지(둘중에 한명인데 밝힐 순없다),, 


귀랑위, 신서유기에 나와 유명하다는 가게(돈벌어서 옆으로 이전까지 했다) 사장과 나를 제외한 일행들.


이건 샤먼 숙소앞길같은데, 길 이름이,,,, 중산로, 밤에는 보행자(여행자)전용도로가 된다. 


사진이 꼬였네, 다시 남보타사 입구.

남보타사..

해변도로에서본 샤먼..

앙코르와트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용수나무(중국식이름)는 구량위(예전 네덜란드에게 조차 된 섬)의 이국정취를 더해준다. 구랑위는 샤먼해변에서 코앞인 섬인데 괜히, 느릿느릿 20분정도 짜증나게 배를 탔던거 같다. 

용수나무를 가리고 계신분들은 마누라님과 (모대학 부총장님의 사모님)


귀랑위의 편안하 보행 등등을 위해 만든 터널, 이곳으로 가면 바로 구랑위 최대 번화가가 나온다고 한다.

바로 이곳이 구랑위 번화가...

샤먼의 바이지우와 함께한 만찬,, 맥주병옆의 깍두기는 중국음식 잘 못먹는 나를 위한 것이었으나, 이번 여행에서 중국음식 트라우마를 거의 벗은 듯,,,

<과연 24일 여행기도 올릴 수 있을지,,,, 일단 건티뉴라고 해 본다.>


그러닌까 이분, 너무 반가워서 감히 내가 어깨를 걸쳤던 이분은, 1950년에 금문도에 고량주를 생산하신 분이다. 이분 석상의 뒷편(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왼쪽으로 금문고량주 제1공장이 있는데, 이분이 서계신 맞은편이 그분이 사시던 집이 박물관으로 남아있다. 


몇년후에 당시 금문도 주둔군의 사령관이던 (찾아보기 귀찮아서 패스) 분과 함께 군인을 위한 술공장을 세우게되는데, 이공장이 바로,,,,


아무튼 나의 고량주 역사에서 중요한 기점이 된 술이니 여기에 기억을 남긴다. 




중국책을 읽다보면 지도가 필요하게 된다. 인터넷에 찾아보는 것도 무척 귀찮은 일이다. 

해서 집 벽면에 중국지도한 장 걸어야지 하던 중 이번에 드디어 질렀다. 

지난공항에 내려 타이안을 거쳐 취푸에서 공부자를 만나뵙고 칭다오가기전 쯔보란 곳을 가려는데 도대체  쯔보는 어디쯤인지 헤매다 지쳐 지르게되었다. 

한시간 정도 공구를 찾아 설치하고 보니, 사진속 주인공이 나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구나.

 가로 210, 세로 150센티미터, 그러나 걸어놓고 보니 크지않다. 

중국 시골 동네까지 나오는 지도를 구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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