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책'을 읽다

한사오궁, 혁명후/기_인간의 역사로서 문화혁명, 글항아리(2016, 408쪽)

취생몽사를 권함 2016. 11. 27. 20:08

어려서부터 무언가에 ‘열광’하지 못했다. 독서는 고전들을 무시하였고,  누군가로부터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확인하고 싶었다.  천박하고 의심이 많은 소인배로 태어난 걸 이제는 받아들이게 되었다. 특히 글쓰는 사람들을 좋아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글쓰기를 그만뒀다는 것은 자기 합리화이지만) 글 뒤에 숨은 그들의 행태를 조금은 지켜봤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싶어진다.  그가 책으로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모든 저작을 읽게된다.  


이렇게 만난 중국작가로는 ‘위치우위’, ‘이즁톈’, ‘장징(중국연애의 발견을 쓴 일본거주 중국학자) 등이 있다. 한국어로 출판된 이들 작가의 모든 글들은 모두 읽은 나는 (이즁텐의 미 완결된 중국사는 제외하고), 그들의 새로운 글들을 항상 기다리고 있다.  이런 즐거움을 주는 작가들 목록 중에 ‘한사오궁’ 이 있다. 


언젠가 그의 “열열한 책읽기”를 읽었는데, 한사오궁의 글을 처음 읽은 나는 '열열한 책읽기’가 담은  고민의 무게에 질린 나머지 ‘나중에 다시 한번 읽어야 겠다’고 스스로를 위로로 한적이 있다. 스쳐갈듯한 그와의 다른 인연은 (우스운)우연이 만들었다.  


 "문(門)은 벽(壁)이 아닌 공(空) 가운데 있으니, 앞을 다투는 세상이란 뜬구름 같도다(門非在壁在空中 爭先之界若浮雲)"는 화두로 우리사회의 ‘경쟁’을 비유했던  이재일의 (20년만에 완결된, 한국 무협소설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기록될) “쟁선계”을 읽다가 어느날 문득, (진지한) 신무협의 주요 갈등은 적어도 ‘선, 악’이 아닌 문화_종교충돌(외래문화와 한족문화의 충돌, 이는 주로 종교전쟁으로 나타나며 무협에서는 유교, 불교, 도교와  배화교 또는 명교,로 불린 조로아스터교_마교 의 갈등으로 표현)로 나타나는 구나, 무릎을 치며 과거 중국의 외래종교와 민간종교운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발견한 책이  (한사오궁의) “마교사전”이었다. 물론 이 책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백련교운동'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소설이라기에는 낯설고 회고담이라기에는 기이한 문화혁명시기를 겪은  '말다리(마교)마을’에 대한 한사오궁의 소설이었다. 책을 받아보곤 당황했지만, 어느새 나는 한사오궁의 다른 책들(산남수북,귀거래)을 주문하게되었다. 그렇게 한사오궁은 내인생의 목록에 들어오게 되었다.  


1년전쯤, 나는 한편의 헐리웃영화(스콧 데릭슨감독 ‘지구가 멈춘 날’)와 한편의 다큐멘터리(얀 아르튀스 베르트랑 감독의 HUMAN), 한권의 책(중국 류스친의 SF ‘삼체’)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인간성을 묻고(삼체와 휴먼), 인류의 미래를 묻는(지구가 멈춘날)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이상’에 대해 거듭 생각해보게 되었다.특히 '삼체의 영향이겠지만' 중국(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문화혁명과정에서의 개인의 경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당시에 이들 세작품을 묶어 그럴듯한 후기를 남기려고 했지만, 이들 작품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 초고에서 멈추고 말았다. 


이후 ‘나의 개인적 경험’을 성찰하게 하는 문혁에 대한 독서를 통해 문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노동자의변혁의지도 이해하게 되었고, 문혁이 남긴 인간성의 극단을 멈추기 위해 '삼체' 우주인을 지구로 불러들이는 아픔도 이해 할 수 있었지만, 인류의 미래에 대해 희망할 수는 없었다. 이제 나는 회의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한사오궁의 “혁명후/기”를 만나게되었다. 혁명후/기는기존 문혁이해에 대한  한사오궁의 발언이다. 그에게 문혁은 마오쩌둥의 권력쟁투나 노동자계급투쟁이 아닌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인간 역사로서’ 파악된다. 당시의 정치환경, 혁명기의 경제-사회적 수준, 인간성에 내재된 야만성 등 역사의 총체로서의 문혁이라는 점, 혁명이 ‘인간의 도덕성의 고양’을 가져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동의하고, 또 동의한다. 


일전의 블랙시트와 트럼프의 당선을 지켜보면서, 나는 근대적 기획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소명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전세계적인 파시즘 창궐의 전야를 우리는 지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의 200만 촛불을 바라보면서도 사실 나는 희망적이지 않다. 잃어버진 10년 이전(김대중 노무현정권하)의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기억해 본다. 그때 민중은 행복했던가? 이래저래 한사오궁에 대해 동의한다. 한사오궁의 전망이 틀리기를, 나의 이 넋두리가 부끄러워 지기를.